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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영국은 어떻게 나폴레옹을 이기고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영국의 약점은 인구가 프랑스보다 한참 뒤쳐졌다는 점이다. 

 

반대로 프랑스의 약점은 해군이 약하다는 점이다. 굳이 육지에서 주로 싸우는 나폴레옹이 해군을 키울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군은 쓸만한 병사를 하나 키우는데 몇년이 소모되며 훈련 한번하는데도 많은 화약과 대포알이 소모되었다.

 

함선을 하나 건조하는데도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 필요했다. 

 

 

 

 

 

 

 

범선이 많은 무기와 선원들을 싣을 수 있는 크기를 갖추고 대포의 반동을 견딜수 있어야했다.

 

배에 싣는 대포도 고급무기였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해군에 이렇게 돈을 쏟아부을 여력이 없었다.

 

 

 

유럽대륙이 거의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가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영국은 나폴레옹에게 선전포고한다. 

 

선전포고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도 눈엣가시 영국을 꺾기위해 18만 대군을 집결시킨다.

 

물론 나폴레옹이 집결시킨 군대 중 대부분이 육군이었다.

 

반면 영국은 해군이 주력이었다.

 

 

 

나폴레옹은 굳이 영국의 모든 해군을 상대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는 해협. 그 해협에서 단 24시간의 제해권만 확보하면 된다.

그럼 우리 무적 육군이 영국으로 상륙해서 전쟁을 끝내버리면 돼.

혹시 모르니까 스페인한테 함대좀 보내달라고 하자.

 

 

이렇게 영국은 나폴레옹과 스페인 함대를 상대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국은 넬슨제독에게 지휘권을 주고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할것을 명령한다.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곶에서 대치 상태 중이던 영국 전함(빨간색) 27척이 프랑스 전함(파란색)18척과 스페인 전함(검은색)15척을 향해 돌진한다. 

 

 

 

 

 

 

트라팔가르 곶

 

 

 

사실 넬슨은 전투 전 각 전함의 선장들을 불러 "영국은 제군들이 각자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고 믿는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별다른 전술지시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돌진할테니 알아서 잘 지휘하고 잘 싸워달라는 뜻이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모든 책임은 넬슨 제독 본인이 지기로 했다. 

 

넬슨이 이런 판단을 한 이유는 

1. 프랑스 해군은 해전경험이 부족하다. 

2. 프랑스와 스페인은 연합군이라 조금만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어도 지휘체계에 혼선을 줄 수 있다.

3. 영국해군은 그간의 훈련과 실전으로 노련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많았다.

4. 영국은 각 전함간의 신호체계가 더 신속정확했다.

 

단순한 기동과 전술로 전투를 할경우 오히려 영국이 불리했다.

하지만 전투를 유기적으로 끌고 가며 계속해서 예기치 못한 변화를 주면 경험이 부족한 프랑스군은 큰 혼란에 빠질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돌진한 영국함대는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포를 쏘아댔다. 

 

 

 

결국 전투는 1명의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단순한 기동이 아닌 각 범선의 지휘관이 각 상황에 맞게 지휘해야만하는 전투로 방향이 바뀌었다.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단한척도 격침당한 함선이 없었으며, 프랑스-스페인은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이 나포되었다.

 

이때까지 영국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둔건 200년 전 스페인 국왕 펠리페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승리로 영국은 나폴레옹의 영국지배 야욕을 완전히 꺾고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했다.

 

 

위에서 말했지만 일반적인 국가들은 전함을 건조하고 그 배에 대포를 싣고 화약을 써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자금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국은 해군에 쓸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당시 영국의 국채금리가 주변국들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사실 명예혁명 이전까지만해도 영국금리는 10%를 훨씬 웃돌았다. 

 

왕실의 '채무불이행'이 빈번하게 있었기때문에 영국왕실에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높은 금리를 원했다. 

 

내 돈을 빈번하게 떼먹는 사람과 성실하게 갚는 사람 중 누구에게 더 많은 이자를 받을까??

당연히 자주 돈을 떼먹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이자를 받아야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국왕실은 더이상 돈을 떼먹지 않았다.

명예혁명 때문이었다.

영국의회가 네덜란드에서 자란 영국의 핏줄 윌리엄3세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면서 약속을 받아냈다.

 

 

윌리엄3세

 

 

새로운 세금을 걷을 때는 의회의 동의를 얻을 것.

사실 이전까지 왕들은 돈이 모자라면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세금을 걷었다. 

하지만 윌리엄 3세는  그럴 수 없었다. 

 

의회의 권한과 기반이 왕보다 강력했고 이전 국왕들처럼 국채를 발행하고 갚지 않으면 곧바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윌리엄3세가 돈을 빌리고도 성실히 갚자 전 유럽의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제때 돈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만한 투자처가 없었기때문이다.

 

국채금리는 점점 낮아져서 1702년에는 6%, 1755년에는 2.74%를 기록한다. 

 

이렇게 저렴한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된 영국은 그 돈으로 경제와 군사력을 발전시킨다.

 

특히 윌리엄은 네덜란드 출신이었기에 네덜란드의 금융기법과 금융가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전에 쓴글에서도 잠시 나왔지만 명예혁명은 영국의 '산업혁명'의 배경이 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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