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제는 역사다.
그중에서도 전쟁사다.
1914년 7월 28일에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에 끝난 1차 세계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다.
사라예보 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발칸반도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간다.
오스만 제국 또한 1877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발칸반도의 지배권을 잃는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 등 여러 동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다만,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연히 보스니아 내부에서는 반발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 또한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고 싶어 했으므로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지배가 못마땅했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의 각 민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려 했다.
이렇게 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자치권을 가진 보스니아가 세르비아에 협력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다.
그러던 중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유럽에 퍼진다.
이때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출신의 민족주의자 청년 몇 명이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 역에 도착하며 자동차에 탑승했다.
첫 번째 암살단원의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바로 두 번째 단원이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수류탄이 차를 맞고 튕겨나가며 암살에 실패한다.
이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친다.
수류탄을 던진 암살단원은 독약으로 자결하려 하지만 약효가 없어서 강물에 뛰어든다.
하지만 강물도 가뭄으로 수심이 얕아진 상태였으므로 곧바로 생포된다.
자백으로 인해 나머지 단원들도 암살을 포기하고 만다.
그 시간 황태자는 영접행사를 마친다.
이후 군사훈련 참관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황태자는 갑자기 일정을 바꿀 것을 명령한다.
수행원들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측근들이 만류했지만 기어이 황태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측근들은 결국 암살을 피하기 위해 병원까지 가는 경로를 바꾸는 것으로 타협한다.
하지만 자동차는 예정된 기존의 길로 들어섰다.
운전기사 하라 중위는 경로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이다.
측근들이 경로를 바꾸라고 소리쳤으며 차는 멈추었다.
하필 그때 암살에 참여도 못하고 있던 한 암살단원이 평소 자주 가는 카페를 서성거리다 눈앞에서 황태자 부부의 자동차를 보게 된다.
그의 이름은 '가브릴로 프린치프'이며 19세였다.
프린치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태자 부부에게 권총을 쐈다.
황태자는 당시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총알이 목에 명중하며 사망한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한다.
1. 모든 반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2.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3. 관련 조사를 위해 오스트리아 조사단이 세르비아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것.
세르비아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생각해서 거부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1달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훗날 전문가들은 오스트리아가 시간을 지체한 것을 큰 실수로 지적하고 있다.
이미 삼국 협상, 삼국동맹 2개의 세력이 팽배 한때에 1달 간의 기간으로 각국이 이익을 계산하며 전쟁에 뛰어들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삼국 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이루어진 동맹세력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독일로 이루어진 삼국동맹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1차 세계대전을 시작한다.
이어 8월 2일,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동맹국이었던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한다.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독일제국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은 이미 1905년 준비해둔 전쟁계획이 있었다.
이 전쟁계획을 '슐리펜 계획'이라고 하며 이에 따라 독일은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한다.
8월 3일 슐리펜 계획을 발동한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다 벨기에 군에 저지당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공한다.
다음날 8월 4일 삼국 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한다.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영국에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 이전 영국에 발주한 전함 2척이 정박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건조비용도 이미 지불한 상태였다.
하지만 참전을 선언하며 영국은 전함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의 해군을 강제로 퇴함 시키고 배를 점거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격분하며 항의했으나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1일에 1,000파운드 임대료를 줄 테니 전함 인수인계를 미룬다고 통보한다.
영국의 함대 전력 증강도 이유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오스만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배를 넘겨주지 않은 것이다.
오스만을 독일 진영으로 분류한 것이다.
당시 오스만은 친독파와 친영파가 나뉘어 대립 중이던 시기였다.
처칠의 생각과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처칠이 전함을 강탈하자 오스만 내에서 반영 친독여론이 강하게 힘을 받았다.
게다가 이때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오스만 제국에 전함 2척을 선물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영국의 전함 강탈에 복수하기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고 1914년 11월 1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후 1915년 5월 23일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립을 선언하던 이탈리아가 참전을 선언한다.
그런데 본래 동맹세력이었던 삼국동맹이 아닌 삼국 협상 측에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쟁의 흐름을 지켜보다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배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한다.
미국은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다.
독일계 이민자 800만 명이 독일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으며 영국의 숙적인 아일랜드계 이민자 450만 명은 영국을 싫어했다.
또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내세운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였다.
하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이 격침되며 미국인까지 죽게 되자 독일에 대항하자는 여론이 커진다.
영국과 프랑스에 물건을 팔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영국과 프랑스가 패망하면 돈을 떼일까 봐라는 이유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특이한 점은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 년간 대규모의 전면전이 없었고 대부분 전쟁이 단기간 국지전 수준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 자원입대병들은 조국의 군대가 우월한 무기로 타국의 군대를 쉽게 무너뜨리고 자신은 전쟁영웅이 되어 고향에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동안 있었던 전쟁처럼 소규모에 단기간 전쟁을 예상한 자원입대병들은 이후 4년이 지나서 고향에 돌아왔다.
전쟁의 시작
제1차 마른 전투
1914년 9월 6일 제1차 마른 전투가 시작된다.
파리 시 마른 강 유역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저지한 전투이다.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프랑스군은 계획적으로 후퇴를 계속했고 프랑스군 서쪽에 있던 영국군 4개 군단도 함께 퇴각을 계속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동안에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후미는 추격하는 독일군에 포화를 퍼부어 상당한 손해를 주고 있었다.
독일군 우익은 파리를 향하여 하루 40킬로미터의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보급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병사들도 휴식을 취하지 못해 마른 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독일군의 최우익은 제1군으로서 그 동쪽에는 제2군이 있었다.
그런데 제1군은 갑자기 파리 진격을 중지하고 눈앞에 있는 프랑스 5군을 포위하기 위해 돌연 진로를 바꾸었다.
그렇게 독일 제1군은 2군과 함께 파리의 동쪽을 흐르는 마른 강을 건넜다.
그런데 9월 7일 프랑스군 사령관 조프르는 이때까지 철수를 중지하고 돌연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영국군도 이에 합세하였다.
이에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계속 후퇴하리라 믿고 있던 독일군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의 총반격을 받은 독일군 1군과 2군은 병력 부족으로 연락이 끊겨 그 간격이 50킬로미터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2개 사단 병력이 전선에서 빠져 또 다른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후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2개 사단은 양쪽 어느 전투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때 룩셈부르크에 있던 독일군의 참모 본부에서 정보 참모 헨츄 중령이 참모총장의 대리로 마른 전선에 파견되어 왔다.
그는 1군과 2군 사이에 50킬로미터나 간격이 생긴 것을 무척 위험하게 보았다. 그는 1군과 2군 사이의 50킬로미터 공간에 적군이 들이닥친다면 1군과 2군이 연락이 끊겨 무척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만일 1군과 2군 사이에 적군이 돌입한다면 곧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고 나서 이튿날 헨츄 중령은 제1군 사령부를 찾아가 적의 대부대가 이 공간에 돌입한다면 2군은 퇴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1군 사령관 클루크는 승전 직전에 있던 울크 강변 전투를 중지시키고 오후 2시 후퇴를 명령했다.
사실 2 군은 정오에 퇴각했다.
적의 보병 부대가 대규모로 그 공간을 향해 돌입해 온다는 정찰기로부터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찰기가 발견한 것은 전진하는 줄도 모르고 이 공간에 들어온 영국군 군단으로서 그들은 별로 이 공간에 진입해야겠다는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2군 사령관 뵐로우는 이것이 적군의 의식적인 행동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1군과 2군의 퇴각은 연이어 3, 4, 5군의 퇴각을 불가피하게 했고, 이리하여 9월 11일 서부 전선의 독일군 7개 군 중 우익의 5개 군은 엔 강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107만 명이 독일군 149만 명에 맞서 싸웠으며 프랑스가 승리했으나 피해규모는 프랑스 26만 명 독일 25만 명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또한 승리한 프랑스는 파리를 잃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반면 독일은 전쟁 조기종결에 대한 희망이 무산되고 전술을 참호전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베르됭 전투
1916년 2월 21일에서 1916년 12월 18일까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가장 거대한 전투 중 하나였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프랑스 북동부에 소재한 '베르됭 쉬르 뫼즈'였다.
독일군 제5군은 프랑스군 베르됭 요새 군단을 공격하며 베르됭을 내려볼 수 있는 포격 전상 요충지를 접수하기 위해 뫼즈 강 우안의 프랑스 제5군 주둔군을 공격했다.
독일의 전략은 고지를 선점한 뒤 프랑스군이 고지 위의 독일군을 공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출혈을 유도하고자 함이었다.
전투 초반에는 독일군이 우세를 점하였으나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베르됭 북쪽에서 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1918년 연말이 될 때까지 베르됭에서 잃어버린 구역 대부분을 수복했다.
독일의 패인으로는 악천후도 있었다.
악천후로 인해 독일의 베르됭 공세는 2월 21일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 사이 프랑스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증원까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프랑스군 20개 사단이 베르됭에 배치되었으며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매우 광범위한 수비가 준비되었다.
프랑스의 페탱 장군은 후퇴는 없다는 명령을 내리고 독일군에게 포격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강 너머를 통해 독일군 보병의 측면을 포격하는 프랑스 포병을 잡기 위해 독일군은 뫼즈 서안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독일군은 상당한 전진을 이루어냈지만 프랑스군의 증원으로 인해 본래의 목표는 이루어내지 못했다.
5월 초가 되자 독일군은 전술을 바꾸어 국지적인 공격 및 반격을 시도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두오몽 요새에 대한 공격 기회를 얻었다.
이때 프랑스군은 일시적으로 요새를 함락시킨다.
독일군은 재차 전술을 바꾸어서 이번에는 뫼즈 양안을 번갈아 공격해서 다시 요새를 함락시켰다.
독일군은 보 요새 너머로 공세를 지속하여 본래 계획의 마지막 지리적 목표 플뢰리와 소빌 요새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혀 플뢰리를 함락시키고 베르됭 성채 밖 4 킬로미터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솜 전투에 포병 지원 및 보병 증원을 돌리느라 베르됭의 독일 공세는 주춤했고, 그 틈을 타 프랑스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6월 23일에서 8월 17일 사이에 플뢰리 점령군은 열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프랑스군 114만 명이 투입되고 독일은 125만 명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최대 추정치로 5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중 16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독일군은 4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중 14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베르됭 전투는 총 303일간 계속되었으며,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베르뒹 전투의 진지 배치도와 300여 일간 바뀌는 영토
Fort - 진지
Battery- 포열
위와 같은 수많은 치열한 전투 끝에 동맹세력과 연합세력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이 참전한다. (위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갈게)
점점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독일군은 굶어야만 했다.
독일의 관료들이 자원을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뒤였다.
중요한 건 이미 프랑스는 한참 전에 식량이 바닥났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미국의 식량원조로 프랑스는 위기를 넘겼다.
원조가 며칠만 늦었더라면 프랑스군은 식량이 고갈될 위기였지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긴 것이다.
이후 삼국동맹은 패전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황실이 무너지고 오스만 제국도 멸망한다.
러시아 제국도 혁명이 일어나서 붕괴한다.
한편 승전국들, 그중에서도 주축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은 어떨까?
그 무렵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다.
프랑스와 영국은 식민지를 더 가지게 되고 엄청난 전쟁배상금도 받기로 한다.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빼앗기고 알자스-로렌 지방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
또한 20년 내에 1320억 마르크를 배상하기로 되어있는데 패전국이 돼서 폭락한 독일 지폐 대신 '금'으로 보상할 것이 명시되어있다.
게다가 독일은 대포 5000문과 비행기 2만 5천대를 빼앗기고 최신 무기 보유를 일절 금지당한다.
이런 굴욕적이고 가혹한 조항들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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